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02xprjZ2sh4)]}}}|| || 상하이 전투 막바지의 모습. || 군벌군 위주였던 화북 전선과 다르게 그동안 장제스가 애지중지 하며 육성한 독일식 훈련을 받은 중앙군의 진가가 발휘되던 전투였다,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경기관총들이 '[[11년식 경기관총|뚜따]][[97식 중기관총|따따]]' 하고 타자기 소리를 냈다면 중국군 경기관총들은 '[[Vz.26|펑펑]][[SIG KE7|펑펑]]' 하는 크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독일의 방공주의 정책으로 군사 고문단과 무장을 받아 이를 위주로 무장한 독일식 사단인 87, 88사단은 훈련도와 개인 무장으로 따지면 일본군보다 나았다. 하지만 [[쑨원]]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 있던 분열과 북벌전쟁을 치루며 군벌들과 싸우고 그 후에 [[반장전쟁]]과 공산당 탄압, [[시안 사건]]을 거치며 장제스는 누구도 믿지않고 자신 스스로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로 인해서 장제스의 폭주에 가까운 지휘와 무능했던 국민당군 장교들의 뻘짓으로 그 엘리트 사단이 3개월 만에 상하이에서 반 정도가 날아가버린다. 젝트라인이 있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 할 줄을 몰라 수도 난징이 상하이 함락 이후 짧은 시간 내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된다. 상하이-난징은 평야지대고 또 [[양쯔강]] 바로 옆에 있어 난징은 군사적으로 몹시 취약했다. 중국군의 피해는 전사자만 25만에 달했으며 부상자를 합치면 40만명을 잃었다. 무려 73개 사단이 무력화되었고 그 중 27개 사단은 독일식으로 구성된 정예병이였다. 겨우 훈련된 30개의 독일식 사단중 27개가 여기서 터져버린 것 이다. 이로 인해 난징을 사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 난징은 상하이 함락 불과 한달 후인 12월 13일 함락되고 난징에선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도 녹록치 않은 전투였다. 최소한 911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를 합쳐 4만 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는데 빠르게는 2주, 길어야 5개월이면 중국의 항복을 받아낸다고 자랑하던 일본군은 3개월 만에야 겨우 상하이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파견된 일본군의 절반 이상이 질병과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지칠대로 지친 일본군의 군기이완은 심각해진 수준이었으며 장교진의 부재 등 갑작스럽게 폭증한 일본군의 운용 측면에서도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마오쩌둥이나 중화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연구들도 이 시기의 국민당군의 분투만은 부정을 못한다. 전차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의 전투력도 예상 이상으로 강했고 젝트라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서 한 요새 뚫을 때 마다 적의 전력은 비교적 쉽게 퇴각해서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또 전투는 이겨도 패한 국민당군이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쳐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고 이에 도쿄의 대본영은 "이쯤에서 적당히 끝내라"라 지시했지만(이게 웃긴게 일본 육군 사령부 에선 피해가 예상 밖으로 심각하니 확전을 자제하려 했지만 전선의 분위기는 다 죽여 없애자 였고 그러다 보니 급히 진격하는 경우가 많아 일본 정계에서 볼 땐 일본군이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여서 더 공격적으로 지시했다. 오죽하면 '''정계와 군부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란 얘기가 나왔을 정도이다.) 피해도 크고 계속해서 중국군이 괴롭혀 당시 중지나 방면군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증오가 어마어마 하게 컸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더욱 커졌고 이는 [[난징 대학살|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학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한편 일본군은 상하이에 [[한간]]들을 조직하여 [[상하이 시 다다오 정부]]를 수립한다. 서구 학계에서는 상하이 전투를 두고 '''중국판 스탈린그라드'''라고 평한다.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와는 달리 중국이 패배한 전투였지만, 국민당은 이 전투를 통해 일본의 전투 수행 능력을 반감시키고 일본의 중일전쟁 대전략 자체를 바꿔놓았다. 본래 수 개월 안에 중국 전체를 패퇴시키려는 일본 제국이었기에 중국이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묶어놓은 것만으로도 일본 제국의 대전략을 속승(速勝)에서 격멸(擊滅)으로 바꾸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초반의 파죽지세 같은 기세를 잃고 충칭이나 청두로 진격할 역량 자체를 상실했다. 그리고 장제스와 중국지도부의 구상대로, 중일전쟁은 중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무제한적 소모전, 지구전으로 접어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